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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부정공>겸천정사기(謙川精舍記)
謙川精舍記 謙川發源於曹溪山引衆小水演迤數十里至竹林村前而與廣川合大小殊勢其於汪洋泓淳似有遜讓之道然沿流以上雄林之閭落沃衍之土壤隨滙隨灣羅絡相望潤井臼利灌溉無不於玆乎取資抑謙也故能受益受益故又推葢於人如此此其川所以得名也歟竹林西負墩狎渚而有一區祠宇腏食我家三世與金朴三公白 肅廟世己然所謂謙川書院是己盖南州人士謂諸先生或居於籍於玆鄉且後先樹立節義與同禮可合祭社爲之虔奉者也舍乃院章甫燕息之所故曾無別扁相傳爲有司房者名雖欠雅盖實際也或曰建院時所築或曰故柳月波攸廬獻徵綿邈未詳孰信凡三楹爲燠室者二爲凉榭者一而喬木數挺蓊蔚環擁拓窓而坐川輸全面相對如鏡而漂花游鱗可歷歷數夜來得月最多詎料楊州二分復見於萬里外小江南耶在 太皇戊辰以朝令院遂撤而壇焉舍獨巋然六十年間頹而嗣葺屢矣而但吾宗族有大聚會則處焉否則勑守僕謹灑掃而己第念方其有院也人皆知爲院中屬僚今院既無矣則所謂實際者全歸為有只一尋常屋子耳嗚呼見今玄黃改色 廟社己遷凡域内大小院宇之載春官祀典者無由得而考焉則况此等屬僚乎况屬僚而曾無扁者乎名者實之賓苟欲存其實不容無名是故錫嘉曰謙川精舍夫川名轉而爲院額院額轉而爲屬僚此精舍之實際也天地間逝者如斯而未甞徃而諸先生之風又與之俱長然則此舍之關重豈獨吾趙氏一家而止哉前日之累頹累葺者以此勅守僕謹灑掃者以此而且今日名之欲其異也記之欲其久也登臨者尚觀乎此而知所起敬與他尋常屋子逍別矣乎 玉川 趙寅錫 記 겸천정사기(謙川精舍記) 겸천은 근원을 조계산(漕溪山)에서 일으켜 여러 작은 물을 끌어 들이고 느린 느린 수십 리를 길게 흘러 죽림마을 앞에 와서 광천(廣川)과 합치니 크고 작은 형세는 다르나 그 깊고 넓으며 맑고 고인 것이 겸손하고 사양한 도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풀이 웅장한 마을과 기름진 토지가 물돌아 나간 뒤와 물굽이를 따라 나열되어 서로 바라보며 부엌살림을 윤택하게 하고, 농사물 대기에 이롭게 한 것이 이에서 자료를 취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이는 겸손한 까닭에 능히 이익을 받을 수 있었고 이익을 받는 까닭에 또 그 이익을 사람에게까지 미룬 것이 이와 같았다. 이것이 바2냇물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죽림 서편 돈대 아래 물가에 사우 한 채가 있는데 우리 三대와 김박 三공을 향사한 것이 숙종(肅宗)때부터 비롯하였으니 이른바 겸천서원(謙川書院)이다. 대개 남주(南州) 인사가 이르기를 『모든 선생이 혹 이 고을에 적을 두고 또 선후 간에 절의를 함께 세웠으니 예의상 가히 사우에 합제하고 공경히 받들 바이다.』라고 하였다. 정사와 서원은 선비들이 편안히 쉬는 곳이라 일찍이 별다른 편액(扁額)이 없고 유사방(有司房)이라 전한 것은 명칭이 비록 유아(儒雅)한 뜻이 없으나 대개 실제를 말한 것이다. 혹은 서원 건축 시에 세운 것이라 하고 혹은 옛 유월파유려(柳月波攸廬)라 하니 헌징(獻徵)한 바가 아득하여 어느 것이 자상한지 믿지 못하겠다. 대체로 이 三간집은 더운 방이 둘이요 서늘한 대청이 하나인데 큰 나무 두어 그루가 울창하게 둘러싸고 있으며 창문을 열고 앉으면 냇물 전면이 거울을 서로 대하듯 뜬 꽃과 노는 고기를 가히 역력히 셀 수 있고, 밤이 되면 밝은 달이 마냥 비쳐오니 어찌 양주(楊州)를 둘로 나누어 다시 만 리 밖에서 소강남(小江南)을 예서 볼 줄 알았으랴! 太皇 戊辰年에 조정의 명령으로 서원은 헐어 단을 쌓고 정사만 홀로 우뚝 섰더니 六十년 사이에 많이 퇴락하였다. 자주 수리하여 다만 우리 대종중회의 때에 거처하고 그 밖에는 수복(守僕)을 신칙하여 부지런히 청소나 할 따름이라 생각하면 그 서원이 있을 때는 사람이 다 서원에 딸린 집으로 알지마는 이제 서원이 이미 없으므로 이른바 실제는 전부 없어졌으니 다만 한 채의 보통 집일 뿐이다. 아! 이제 천지가 변색하고 나라 사직이 이미 옮겨 무릇 지경 안에 크고 작은 서원과 사당이 예관(春官)에 실려 전사(典祀)한 자를 얻어 보고 상고할 수 없으니 하물며 디 등속의 딸린 집이겠으며 항차 딸린 집으로 일찍이 걸어 둔 액자도 없는 집은 말할 게 있겠는가! 이름은 실상을 인도한 것이다. 진실로 그 실상을 갖추려면 이름이 없을 수 없는 고로 아름답게 주어 가로되 『겸천정사』라 하였다. 시내 이름이 바뀌어 원의 액호가 되었고 원액이 바뀌어 속료(屬僚)가 되었으니 이는 정사의 실제라 하겠다. 천지 사이에 가는 자는 이와 같으나 일찍이 가지 않은 자는 여러 선생의 품성이 또 더불어 함께 유구하다. 그런즉 이 정사가 중요함이 어찌 홀로 우리 조 씨 한 집에 그칠 것인가. 전일에 여러 번 퇴락된 것을 여러 번 수리한 것도 때문이었고 수복(守僕)에게 삼가 소제토록 신칙한 것도 오랫동안 전하고자 함이니 여기에 올라보는 자 이를 보고 공경히 할 바를 알아 다른 심상한 집으로 더불어 멀리 구별했으면 한다. 玉川 趙寅錫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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